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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드래기
2011. 2. 14. 12:40 노는사람/화면


 소피의 선택(1982)

   감독 앨런 J. 파큘라

   출연 메릴 스트립케빈 클라인피터 맥니콜

 

  20세기를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단죄'와 '응징'의 100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으로 세기의 문을 열고 피와 눈물로 얼룩진 속에 방관을 미덕으로 이상한 모럴리티가 자리잡은 인류의 저주가 본격화된 시기라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100년을 바쳐 학살과 보복과 눈치를 보는 시간들을 지나고 보니 역사책의 한 켠이 된 것 처럼 아무런 느낌도 없어지고 차가운 머리로 한걸음 떨어져 바라보는 시각들이 일어서니 딱히 무엇이 잘했고 잘못되었는지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복잡해졌다.

 

  로만 폴란스키가 다행히 대단한 창작력을 가져서 대부분의 작품들이 극찬을 받고 잊혀질만한 유태인학살과 2차대전 전범들에 대한 껄끄러운 추억들을 들추어낸다 하더라도 망명한 성추행범에 불과하고 모든 업보를 다 짊어지고 온갖 동정과 존경을 받은 유태인들도 참으로 암담한 이스라엘의 오묘한 행태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 세상이다. 반복되는 잔혹한 행보들을 보고있자면 필요할때만 민족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의 이기주의란 파시즘이고 나치즘이고 맑시즘이고를 떠나서 가지치기로 떨어져나갈 수 밖에 없는 개인의 강요된 희생을 필연적으로 몰고온다. 예전에 한번 언급했다시피 민주주의란 것 역시 살아남기위한 합리적인 전체주의를 표방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색계」의 비극을 개인의 희생을 강요한 민족주의에 엿먹인 결과라고 떠벌였다면 「소피의 선택」은 그런 발버둥 조차 완전히 불가능한 신에게 버림받은 여자의 이야기라 하겠다.

 

 

■ 화자, 몽상가들




 

스팅고 역의 피터 맥니콜. 지금도 변함없이 순수한 인상의 묘한 매력으로 여심을 울린다.

 

 

 

 이영화에는 이야기의 청자이고 전달해주는 화자인 작가지망생 스팅고가 있다. 특별히 관찰자를 따로 둘 필요가 없으며 이 부분이 더 지루하게하고 작품성이 반감되는 느낌이 든다는 의견들도 적지 않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스팅고의 존재가 없다면 「비엔나의 우편배달부:1974 릴리아나 카바니」와 같은 전후의 우울감에 젖은 영화가 되었을 것이고 스팅고라는 관찰자의 등장으로 「몽상가들:2003,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같은 팬시한 분위기가 어느정도는 무거움을 덜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지루함은 쉬이 떨쳐내기 어려우나 생존자나 전범이 아닌 전후의 세대들로서는 한단계 떨어져 보는 시선이 더욱 솔직할 것이다.

 


 


 

 사람관계에 있어서 '중독'이란 말을 쓸 수 있다면 이런 모양새인가. 자취방의 이웃에 살면서  고등어 얻어먹고 세탁기에 들러붙어 빨래하게 해주세요~가 전부인 우리들의 소박한 청춘을 돌아보자면 참으로 매력적이고 위험한 관계다. 폴란드 친 나치집안출신의 소피와 유태인 네이든, 완전한 미국인인 스팅고는 짜여진 3국의 관계를 관망하는 상징일 수도 있지만 개개인을 두고 볼때 네이든은 학살의 소용돌이를 피한 이민자이며 소피는 피끓는 의식을 가지고 투쟁했다기보다 인생을 송두리째 휘말린 지지리 복도 없는 여자에 불과하다. 그들의 이야기는 공통된 분모가 없으며 둥둥 떠다니는 와중에 만나고 학대하고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에 굳이 이념을 심어서 성장소설밖에 쓰지 못하는 스팅고가 아둔한 미국을 대변했다고 끼워 맞추기에는 너무 순수하다. 스팅고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충격을 받으며 성장하고 뭔가 무게를 가진 아픔을 심은 작가가 될 것이라는 암시도 있지만  끊임없이 두 사람을 사랑하고 소피의 아픔을 끌어안아주고 싶어한다. 여기서 현실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부분은 결국은 상처를 함께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은 알량한 호의를 배푸는 자가 아니라 함께 아팠던 사람일 것이라는 사실. 거창한 이념적 행보로 인류의 평화를 일구어낸 것 같은 미국도 순수하고 우매한 개인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잔혹하고 병들어있는지 상상하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소피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전달해주는 스팅고의 목소리는 그 충격속에서 잔인하게 성장한다. 

 

 

 

 

■ 잉여인간, 신이 버린 사람들





 

 비운의 미치광이 네이든과 소피의 만남은 아이러니다. 극심한 조울증에 시달리는 네이든은 그녀를 사랑하지만  발작이 일어나면 언제나 그녀의 출신성분과 행적에 대해 분개하고 잔인한 말로 학대한다. 그 학대에도 벗어날 수 없는 파국의 사랑은 소피의 말대로 '그가 죽는것 보다 나만 두고 죽는것이 두렵기 때문'.

두 사람을 사랑하게 만들었던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세상과 고립되어 극심한 고독속에도 끊임없이 혼자 소통하고자 했던 그들의 삶과 일맥상통한다.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수도 없는 네이든과 신보다 세상에 떳떳할 수 없고 원망조차 메마른 소피는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다.

 

 인간이란 명사 앞에 '잉여'라는 단어를 쓰는것은 매우 무서운 일이다. 시대에 맞추어 여러종류의 잉여인간들이 양산되고있지만 감히 사람에게 '잉여'란 말을 쓸 수 있겠는가. 빈(貧)과 부(富)가 함께 있어야 호응이 이루어지듯 사회와 민족이 이루어지는데 잉여의 인간은 없다. 무수히 실패하고 버려진 것들 중에서 하나의 성공이 예가되고 의로운것이 되어 전해져 내려올 뿐 결국 나머지를 돌아볼 수 없는것이 전체주의의 맹점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민주주의가 전체주의 반대개념은 아니다. 안철수가 말했다시피 99회의 실패중 1회의 성공을 위해 잔인하게 돌아가는 실리콘 밸리처럼 99회의 실패자에게 기회를 계속 줄수 있어야 하는것이 민주주의인 것이지 희생이 없는 공통분배가 아니란것이다. 20세기 과도기의 잔인한 소용돌이에서 희생된 두 남녀는 더 좋은 세상을 볼 수 없는 비극을 필연적으로 맛보아야했다.  

 

 

■ 일방적인 피해자는 없다



반유태주의 학자인 아버지의 비서로 있던 소피. 말살정책에 대한 연설문을 옮겨적다 가 유태인의 게토를 돌아본다.

지식인의 반열에서 어떤 이념을 떠나 인간을 말살한다는 충격은 그녀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소피는 제대로 교육받은 카톨릭 가정의 성숙한 지식인으로 어떤 투철한 의식이 동하였다기보다 순수하게 인간의 기본으로서 말살에 대한 잔혹함에 치를 떤다. 광적인 민족주의로 딸도 살려내지 못하는 아버지이지만 소피는 끊임없이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이야기한다. 증오할 수 밖에 없고 외톨이가 될까봐 숨겨야하는 아버지의 존재이지만 그녀는 사랑할 수 밖에 없다. 민족을 버리고 핏줄을 버리고 의로운 것을 찾아 게슈타포와 연계하고 이들 처럼 우리에게 손을 내민 일본인들이 있다. 그들이 우리에게 의인의 칭송을 듣기 까지 개인적으로 버리고 고통받아야 했던 사실들, 의로움 앞에 기본적인 사랑을 버리고 숨겨야했던 아픔에 다시한번 경의를 표한다.

 

 영원한 스테디셀러 「안네의 일기」가 보여주는 좁고도 넓은 세상은 사람들에게 '개인'의 성장과 갈등을 보여줌으로서 더 안타깝게 문제를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일기에 나오는 미프나 헹크같은 의인들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음에 감사하고 그 의인들에 의해서 세상이 바른길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전범국가로 반백년을 속죄하며 살아온 독일이 지금에 와서는 매우 성숙한 민주주의와 복지, 분배, 교육의 성장을 보이고 유구한 역사속에 쌓여있던 높은 철학으로 미국의 얄팍한 성장의 상술보다 은근히 우위의 평가를 받는것은 어쩌면 위협적이다.  안네의 일기는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울분을 터뜨리게하지만 전후 독일의 행보와 반성을 보면서 한 사람의, 한 집단의 비뚤어진 야심이 얼마나 이 성숙한 정신의 나라를 병들게 했는지 알 수 있다. 지금도 아우슈비츠에 가면 견학온 독일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봉사자들의 손을 붙잡고 진심으로 미안해 하며 실제로 폴란드계 미국인인 친구에게 독일 이민자인 원어민 교사가 할아버지에게 들었다며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사과하는것을 목격한 적도 있다.  

 

 



아들과 딸 중에 딸을 포기한 소피,  우라사와 나오키의「몬스터」에서 안나를 포기한 쌍둥이 엄마의 선택은

바로 이 씬에서 모티브를 가지고 온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민족주의앞에 희생당한 개인은 피해자에게만 있는것은 아니다. 소피는 열렬한 친나치주의 아버지의 딸이자 아리아인과 같은 출중한 외모로 비교우위를 선점하고 있지만 게슈타포와의 연계로 수용소로 잡혀간다. 게슈타포인 남자친구와 여동생의 앞에서 그들에게 결탁해야 할 것인지 갈등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인간이며 여자이며 엄마인 그녀는 끊임없이 '이런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라고 외친다. 그녀가 말했던 '무엇하나 성공한 적 없는' 그 개인의 행보는 모든 것이 실패다. 수용소에서 두 아이중 하나만 살려주겠다는 장교의 잔인한 제안에 어린 딸을 포기하고 큰소리도 내지 못하고 오열하는 장면은 신이 어디까지 그녀를 내동댕이 칠것인가 가슴아프게 한다. 그녀의 인생은 모든것이 선택이고 그 선택들을 모두 실패했으며 결과적으로 틀렸다. 실패한 혁명은 쿠데타이며 성공한자가 역사가 된다고 했던가. 어떤 운명의 소용돌이에도 휘말리고 싶어 하지 않았던 그녀의 모든 선택은 의로운 것에 탁하였으나 모두 실패했으므로 결국 틀렸다. 끊임없이 유린당하고 비겁하게 엎드려 구걸해도 돌아오는것은 '신이 나를 버렸다'는 결과 밖에 없으니 영화 「아나키스트」의 라스트에서 느꼈던 허무함과 쓸쓸함이 그녀 인생 전부에 몰입된다.

 

■ 적막과 절제. 버림받은 자의 성서.

 

 영화는  마빈 햄리쉬의 손을 빌었음에도 음악에 새로움 없다.  멘델스존을 메인으로 두고 모차르트, 베토벤 교향곡 6번이나 9번 헨델 수상곡 1번 F장조등 간간히 소피의 추억과 무관하거나 감정변화에 맞추어 신의 사이에 흘러나온다. 소피의 자책과 슬픔이 드러난 과거는 철저하게 음악이 배제되어있다. 영화음악은 철저하게 현재의 삶에서만 흘러나오고 아기자기하며 장중하고 활기차기까지 하지만 소피의 과거는 침묵이다. 언니와 내가 '20세기 초의 비극을 모두 담은것 같다' 라고 말하는 브람스교향곡 3번 3악장 같은 비장한 음악이 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지만 글루미 선데이 같은 우울에 허덕이는 효과는 있을지라도 눈물마저 바짝 마른 소피의 허망함과는 맞지 않을 것 같다. 의도야 어찌했건 음악은 광기발랄한 네이든과의 삶속에서 함께 할 지언정 소피의 인생에는 그리고리 소로카의 그림같은 적막만이 흐른다. 그래서 현재는 꿈과 같고 과거는 더욱 생생하다.

 

 


 

 

 

소피의 적막은 에밀리 디킨슨의 시로 한마디로 열거된다. 이민자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에서 넋을 놓고 빠져들었던 그 시를 통해 그녀는 운명처럼 네이든을 만났고 함께 죽었다.

  두 사람의 죽음 앞에 스팅고는 에밀리 디킨슨의  'Ample make this bed'로 종부성사를 대신한다. 신이 버린 그들에게 이 고독한 여자의 시는 그들의 인생이오 사랑이며 성서다. 내 주위에 똑바로 영문학을 공부한 사람이 있다면 그녀에 대해 묻고 싶지만 학점따고 토익보고 임용고시에 정신없을 뿐 공부를 위한 공부를 하는 사람이 없다. 제목도 없던 그녀의 시들이 깎고 깎아 절제된 영문으로 차분히 자리하고 있는 운율을 따르자면 그녀의 생은 죽음, 삶, 세상에 대한 소통의 갈구와 동시에 억제하고있다.  삶을 돌아보며, 천국이 위에 따로있지 않다고 하던 이 시인의 인생 중에 '햇살만이 허락된 심판의 아침'은 이들에게 정해진 행보였으며 두사람의 마지막을 충분히 내다보고 있음을 암시한다. 죽어서도 오랜기간 다듬어졌다 원복되었다 고생하며 발표되었던 디킨슨의 시들은 소피가 가진 신과 믿음에 대한 회의, 세상에 억눌려있던 네이든의 열망과 좌절을 모두 담고있다.  

 

Ample make this bed.                                        
Make this bed with awe;
In it wait till judgment break
Excellent and fair.

Be its mattress straight,
Be its pillow round;
Let no sunrise' yellow noise
Interrupt this ground. 

 

 

■ 우리는 과연 할 수 있습니까?

 

 요즘 우스개 소리로 '전쟁은 100년에 한번씩 꼭 일어나야 인구정비가 된다' 라고 말 하곤 한다. 지루하고 불안한 평화를 질질 끌어오면서 어느순간 잔인하게도 스스로 전쟁을 기다리는 이상한 경지에까지 온 세상이다. 총과 칼을 들고 두려워 하면서도 사람들은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과잉발달은 사람을 다른쪽으로 도덕적 관념에서 멀어지게 하고 개인은 끊임없이 희생을 요구받는다. 특정 집단의 머리싸움에 의해 개인이 협조해줄것을 '정중하게' 강요받는 세상은 지금도 계속되고있다. 흉기를 사용하지않고 피를 흘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 희생이 개인의 '능력'이거나 '게으름'의 산물이라고 치부해버리며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기회'를 바탕으로 한 20세기식 선진이념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물질의 풍요가 전부인 세상에 이 좋은 21세기에는 또달은 부모들이 소피의 선택을 한다. 권력의 이동과 부의 축적은 예나 지금이나 정해진 계보가 아니면 뒤바뀌기 힘들다.

 

 운명의 수레바퀴라고 하던가. 유행이 반복되고 역사가 반복되는것은 똑 같은 형태가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에게 타격이 된다. 지루한 평화의 끝을 붙잡고 혼란스러운 지구 반바퀴를 관망하고 있자면 복수의 복수가 거듭되는 학살의 현장은 두렵다. 20세기의 과오를 헐뜯고 넘어가기에는 이미 그 이상의 단계를 넘어온 실정이다. 고도로 발달된 복수의 방법들은 지금 나의 가까운 곳에서 일어날 수 있다. 누군가는 돈에, 먹을 것에, 하나의 목숨에, 심판의 아침을 기다리는 삶들도 참을 다양해졌다. 얼마 전 「울지마 톤즈」를 보면서 이태석 신부의 행보가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된 것에 안타까워하면서 개인의 선행에 눈물 흘리고 아파하고 공치사로 끝날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나라의 경제 난국에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공익광고를 틀어가면서 힘내달라고 아둔한 머리를 조아릴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노력이 100명의 기회로 그 기회를 더 많은 기회와 희망으로 만들어줄 사회의 보답역시 당연히 필요하다. 선택하고 자책하고 죽어가는 것이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것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애주가의 짤방




 

 

샤또 마르코라니.

와인 마니아는 아니지만 애주가의 입장에서

샤또 마르코라니. 자막 마음대로 쓸래?

히어링이 아무리 자신있어도 딴나라말 섞여있으면 좀 찾아보고 쓰길 바라는 소박한 마음

 

 

 

"평생을 성자처럼 살다 죽는다면 천국에서나 마실수 있을거예요"

 

정말 그렇다면 착하게 살다 죽어야겠다. 

 

 

 

 


소피의 선택

Sophie's Choice 
9
감독
알란 J. 파큘라
출연
메릴 스트립, 케빈 클라인, 피터 맥니콜, 리타 카린, 스테펜 뉴먼
정보
드라마, 로맨스/멜로 | 영국, 미국 | 157 분 | -




 


posted by 다드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