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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드래기
2011. 4. 22. 20:53 노는사람/화면


 


블랙스완(BLACK SWAN,2010)

   대런 아로노프스키

   나탈리 포트만벵상 카셀밀라 쿠니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암흑기로 2010년 내내 별반 마음에 드는 영화가 없는 상태였다. 2년쯤 뒤에 보고 갑자기 마음에 들 지도 모르는 일이다. 영화를 한 번 보고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하기가 쉽지 않다. 호불호가 극명한 나는 정말 마음에 들었거나 정말 싫었던 것이 아닌 이상 평이하게 나불거리기가 힘들다.

 

 10년만에 찾아온 긴 백수의 주기로 여러편의 영화를 보았지만 딱히 포스팅이 힘든 것은 딴짓을 하고있는 탓도 있었으나 그만큼 인상깊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말 귀한 신작영화의 포스팅, 그것도 따끈따끈한 아카데미 수상작이라니 앞 뒤 훑어보아도 이렇게 포스팅한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더 빨리 할 수도 있었지만 이 영화를 본 그날 난 아침에 면접을 보았고 극장관람 직전에 핸드폰을 분실했다. 아주 정신 없는 날이 이후 열흘간 계속 되었기에 여러모로 쓰디쓴 기억을 남긴영화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해야겠다.  

 

 대역이니 아니니 말이 많다. 춤은 출 수 없었다 하더라도 그녀의 수상에 이견은 없는바이다. 반전영화는 전쟁에 반대하는 영화라 했던가? 더이상 반전을 위한 반전은 새롭지도 않다. 블랙스완이 내세운 것은 뻔히 보이는 반전을 알아맞혀봐 라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카메라가 그녀의 내면에서 같이 움직이고 있는것에 의의가 있다.

 

 

 

 ■ 깊이에의 강요, 익사(溺死)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를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과 휘몰아치는 죄책감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예술이란건 사실 예(禮)를 다해서 술(酒)을 마시는것이라 했던가(-_-). 지금도 말 한마디 할때마다 깊이가 없어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움찔할 때가 있는데, 이렇게 궤변을 늘어놓고 학위없는 학자입네 지껄이는 것도 사실은 나의 얕은 모습을 어찌해서든 '있어보이려고' 쫄깃거려보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 그래야 누가 또 읽어주기나 열심히 읽어주려니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전직 발레리나였을 싱글맘에게 금이야 옥이야 키워진 딸 니나, 이래서 애매하게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에게 결혼과 출산이 오히려 죄악이 될 수 있나보다. 항상 입에 달고있는 '내가 지금 상태에서 딸이나 낳으면 엄청나게 괴롭힐거야' 라는 것이 이런 경우에 기인하겠다. 자신을 딸로 치환해서 대리만족을 구하고자 하는 욕심과 사랑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나는 내가 하지 못한것을 내 자식이 하면 자랑스럽기 이전에 매우 질투가나서 못견딜 것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실체화 된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나와 딸은 하나의 몸이오,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이니 나는 죽고 너에게 모든것을 바친다. 뒷바라지가 아닌 둘 중 하나의 인격체는 철저하게 포기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니나의 해리장애는 사실 분리되어있어야할 엄마와 자신의 현실적 자아가 거듭 방해받으면서 육신을 벗어난 경우일 것이다. 니나만큼 집중적으로 탐구하고있지는 않지만 관록으로 숨겨져있는 니나 엄마의 예민함과 무서운 집착이 직접 언급되지 않은 니나의 어린시절을 짐작케 한다.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항상 논란이 되는 것은 반전이냐 아니냐. 곁가지로  이제 지겹지 않느냐, 반전영화는 전쟁을 반대하는영화다 등등의 '만화가 과연 예술인가' 같은 절대로 풀리지 않는 논란으로 평생 월급을 받아먹는 사람들 처럼(이런..)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들이다. 어쨌든 경우없는 나의 결론은 그냥 이것은 '깊이에의 강요'다. 어마어마한 교육열과 물질적 풍요로 테크닉은 빼어나지만 재미없는 만화책이 넘쳐나는것 처럼(정말 슬프다)  어린아이들의 덧글 몇마디에 자아도취하고 신나있던 풋내기가(물론 주인공은 풋내기가 아니지만) 깊이가 없다, 재미가 없다는 한마디에 깊이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도 스스로  또 깊이에의 함정에 빠져서 혹시나 원작이 있지 않나 뒤적거렸다. 뭔가 롱테이크로 이어지고 긴박한 카메라워크에서 유럽영화의 냄새를 맡고 자극적이고 어쩌면 간단한 스토리구조에서 헐리우드의 양념을 살짝 얹은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발짝 더 파고들자면 '렛미인'의 영국버전을 먼저 보고나서 이상한 아쉬움에 스웨덴판을 찾아 보았던 느낌 같달까. 어쨌든 이 또한 어마어마한 깊이에의 강요다.

 

 

 

■ 니가 웃으면 때리고 싶어.

 



니나의 공포 릴리. 천박해 보이고 가벼워 보이지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뇌쇄적인 신비주의를 가진여자.

 

 어디 예술가에 국한되겠는가마는 겉으로 보기에 그의 삶이 여유로워 보이고 별반 노력없이 모든것을 얻는듯 보이는것은 정말 짜증나는 일이다. 실제로 전생에 나라를 구한 듯 굉장히 일이 쉽게 풀리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은 깊이에의 집착도 없고 스스로 그정도의 깊이에 만족할 줄 안다. 세월을 거듭하면서 결국 사람들도 그의 그정도 수준을 전문가의 입장에서 인정해주고 자신도 자신의 그릇을 충분히 알고 상호작용하게 되지만 진짜 무서운 사람들은 얘들이 아니다.

 

 '신세대보고 어른들은 몰라요'에나 나올법한 엄친아 엄친딸의 공포는 바로 '겉으로 보기에 정말 아무것도 없고 골이 빈듯하나 사실은 어마어마한 깊이를 가지고있는 사람들'이다. 간혹 그 겉모습에 매료되어 자신도 그리행동해보고자 어설프게 따라하다가 아주 치명상을 입는 경우를 많이 보는데, 우습게도 겉만 따라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똑같이 따라해도 그 솜털같은 가벼움이 그대로 묻어나니 '깊이'란 것은 얼마나 달달 달이고 찌꺼기를 빼내야하는지 아주 어려운 일이다. 평범한 일상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그 존재가 재미있고 즐겁고 간혹 존경할 만한 대상이지만 나처럼 자못 깊이에의 강요를 경험하거나 진행중인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신경이 예민해지는 일이다. 그 사람의 한마디에 내가 쌓아놓은 공이 물거품이 되거나 사람들이 바라보는 인정의 척도가 달라기지 때문에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데 혼자서 설레발치고 발악하기 쉽상이다. 아마데우스와 살리에르 같은 경우, 비교나 되려나?

 

 


극이 진행되면서 주인공 니나가 점점 말라가는것이 눈에 띈다. 춤을 대역을 했든 말든 그녀의 열연이 지탄받을 이유가 될까?

 

  고등학교때 발레하던 친구가 미술로 전향하고 나서 단 6개월만에 20키로그램 가까이 살이 쪘다. 딱히 한것없이 춤을 안추고 밥을 남들처럼 세끼 먹었을 뿐이다. 그 단아하고 인형같던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녀는 미친듯이 행복해했다. 대한민국 교육제도의 특성상 춤추는 인문계고 학생(즉 몸을쓰는)들은 학교생활이 거의 없는데 2년간 수업을 듣는둥 마는둥 하다가 고3이 되서야 학교생활을 해본 아이에게 친구는 잘 생기지 않았고 그나마 성질 특이하고 호기심 많은 나와 미술부 아이들과만 말을 트고지냈다. 졸업식날 나에게 고맙다고 벨기에 초콜렛과 장미꽃다발을 주었는데(내 생에 첫 꽃다발 호!) 나에게는 별것 아니었던 친구관계가 한 사람에게 얼마나 큰것이었는지 알게된 날이었다. 이렇게 끊임없이 굶고 제한받고 차단당하고 갖힌 삶에서 사람이 무언가 뚫고 나오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아주 어릴때부터 몸에 밴 발레를 그만두고 그녀가 그림에 매달렸을 만큼 자기 자아를 내뱉을 결정적인 도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은근한 시기와 질투의 대상에서 한물간 킹카취급을 받아도 그 쓸데없는 강요에서 벗어난 그 아이의 행복은 하루에 네다섯끼 원하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내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너무 어린나이에 내면의 중요함이 폭풍처럼 밀려왔는지 그 그림에의 열정은 아무도 따라갈 수 없었다. 테크닉으로는 늦게 시작했다 하더라도 우린 알지 않는가. 남보다 조금 늦더라도 테크닉따위는 연습 하면 된다는 것을.

 

 

 ■ 무언가 애매한 비극

 

 나이를 꽁으로 먹는것은 아닌지 예전에는 사소한 덧글 하나에도 흥분하고 짜증내기도 했는데 요즘은 그 논란들이 그럭저럭 구경할 만하다. 영화는 허구라는 조건과 누군가의 목적과 사조가 정확하게 표출되었다(적어도 하려고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대중이 보고 왈가왈부하기에 매우 편하다. 블랙스완은 분명 무척 잘 만들었다. 계속 보면서 내 가슴이 두근거렸고 알수없는 불편함과 불쾌함의 공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수상작들의 아주 오묘한 입장은 이거 완전 무조건 휴먼드라마냐, 아니면 죽이는 그래픽이냐, 아니면 완벽한 예술성이냐 라는 어떠한 공식 탓에 생겨난다. 블랙스완의 논란은 이건 예술영화냐 아니냐, 그냥 사이코드라마냐 뭐 시상대에 오른 영화들이라면 흔히 먹는 그런 껌들. 1인칭으로 대입해서 보아야하는 시선의 불편함과 숨소리까지 내것으로 들어야하는 상황은 마음에 안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춤을 춘다는 주인공의 입장과 소재상 굉장히 잘된 선택이라고 본다.

 

 언제나 논란의 문제는 관객들 조차도 '깊이에의 강요'를 하게된다는 것이다. 서스펜스 스릴러냐, 예술영화냐, 반전영화냐, 심리영화냐 이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은 다들 이미 휘말려서 허우적대고있다는 뜻일 것이다.

 



정황상 니나의 정신적 결함을 미리 알고 조율했던 감독 토마스. 진짜 능력자는 이 남자였던 것이다. 

 

 그동안 놀면서 수도없이 영화를 보러 다녔는데 포스팅이 거의 없었던것도 여전한 나의 깊이에의 강요다. 그냥 재미있었는데 재미있었다고 한줄로 쓸 수도 없고, 뭔가 한마디 그럴싸해야하지 않을까. 개그라도 날려야하지 않을까라는 부담은 대부분의 블로거들에게 상주해있다. 다만, 편식은 하지 않지만 재미없었던 것을 굳이 욕하면서 쓰는것이 나는 너무 불편하기 때문에 최대한 즐겁게 보았던 이야기만 남기고 싶다. 그래서 내가 블로거는 될 지언정 평론가는 될 수 없고, 학자는 더더욱 못되지 않나 하는 한계가 있다. 몇년 전 '논술을 잘하려면 감상문이 아니라 서평을 쓰세요'라고 하던 모 교수를 신나게 까댔던 포스팅이 생각이 난다. 내가 본 책 내기분에 맞추어 열심히 나불대지 못할 것이라면 난 줄거리밖에 말 못쓰겠다 서평에 논지가 나오려고해도 기본지식이 내것이 되어 나오지않으면 안되는데 막 이래. 그만큼 수동적이고 혼자서는 숙제도 못한다는 요즘 아이들에게 어느정도 기준을 주고자 한 말이었을 것이며 나도 그 뜻을 곡해한 감이 없지 않다. 

 

 자아도취나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 댈 필요야 없겠지만 학습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깊이에의 강요란것이 설득력이나 있게 다가오겠는가. 예술영화가 아니다, 이건 심리영화가 아니라 섹스 어빌리티에 관한거다 막 열심히 그럴싸한 이야기를 하지만 그냥 둥둥 떠있는 몇 네티즌의 재미도 없는 리뷰를 보고 또 깊이에의 강요 한번 해 본다.

 

 

 

 

 

 

 

 

그리고 언제나 짤방

 

 



 

 

모니카 벨루치의 남자. 벵상 카셀

아, 언제나 남자는 37세부터라고 했던가 마흔 넘으면서 부쩍 내스타일 -///-

 

이 남자를 차지하기위해 모니카가 7년만난 남자를 뻥 찼다하지 않는가!!!

 

그나저나 여러 포스팅에서 '이 아저씨를 어디서 봤던것 같다'라는 언급들이 많은걸 보니 나도 나이를 슬슬 먹어가나.

벵상카셀같은 스테디가 '어디서 봤더라'라는 말이 나오다니. 내가 어릴때 에드 해리스를 보고 했던 말과 같군 흠..







블랙스완 (2011)

Black Swan 
8.3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
출연
나탈리 포트만, 밀라 쿠니스, 뱅상 카셀, 바바라 허쉬, 위노나 라이더
정보
스릴러 | 미국 | 108 분 | 2011-02-24




posted by 다드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