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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드래기
2009. 12. 13. 03:13 노는사람/화면

★ 이 영화평은 2009/12/13   母블로그에 포스팅한 내용을 그대로 재작성 한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모호하거나 혹은 지금도 그대로이거나



델리카트슨 사람들 (Delicatessen, 1991)  | 98분

 

감독 :: 장-피에르 주네 , 마르크 카로 
출연 :: 파스칼 베네제크, 도미니끄 삐농, 마리로어 더그나크, 장-클로드 드레퓌스 

 

 전 국민의 교육방송 EBS에서였다. 잔인하고 거부할수 없는 그 우화를 들은것이. 숲의 제왕으로 군림마던 원숭이와 신발을 만들던 돼지의 이야기였다. 어느날 원숭이에게 찾아와 비단신을 조공으로 바친 돼지. 그저 왕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표시라던 비단신은 원숭이왕을 길들이게되고 첫번째 신이 닳자 원숭이는 돼지를 찾아 제값을 주고 신발을 구입한다. 그것이 반복되고 반복되고 반복되면서 수요라고는 숲속에서 왕 혼자이니 신발은 점점 비싸지고 결국 전재산을 탕진한 원숭이는 더이상 맨발로 숲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발이 부드러워지자 돼지의 노예가 되어 평생을 머리를 조아리며 신발을 구하게되었다.

 

 내가 생각하던 '세계3차대전'이란 적어도 쓰레기전쟁이거나 식량난이었다. 그저 공상과학 영화려니 하던 잔인한 매드맥스도 사실은 우리가 예상할수 있는 미래의 가장 근접한 모습일런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고 어디서 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세계관. 인간은 회생이나 농사 도축등을 모두 잊고 나태해져 중독과 같이 인육을 부르짖는다. 칼을 쥐고 있는 자는 그 어떤 정치적인 선동 없이도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토요일 아침마다 MBC에서 해주던 말그대로 '문화 프로그램'에서 재미있는 코메디 영화인가 보다 하던 이 미성년자 관람불가의 영화는 곧 충격적인 비디오로 이 국민학생의 손에 쥐어졌다. 그 이면에 숨은 희망과 아름다움. 인간성의 회복이 없었더라면 자라나는 꿈나무는 얼마나 절망에 덜덜 떨었을까.

 

 

■ 암묵적인 합의 - 나는 살고 싶다.

 

 카니발리즘에 대한 이야기들은 전설의 고향처럼 이어져온다. 온갖 전쟁으로 얼룩졌던 20세기에는 생의 극한상황에서 살아남은 그야말로 밑바닥을 치고 기어 올라온 생존자가 많아 더욱 그러하다. 여러증언을 통한 전쟁영화나 재난영화를 통해서나 알려졌던 카니발리즘의 경험은 희안하게도 주위사람들 중에는 고백하는 이가 없다. 그럼에도 인육은 짜다느니 질기다느니 생생한 이야기와 사람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잘 하여 육질이 그러하다는 구체적 사례까지 전달하니 내가 확인해 볼수도 없고 희안한 일이다.

 



 

 화폐의 가치가 없어진 시대. 생존이 필요하다면 단연 식량이오 인육을 먹을 수 밖에 없는 세상이라면 식물이라면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오래전 '환상극장'에서 본 에피소드가 생각이난다.  한도가 없는 신용카드에 생명을 적립해서 태어난 인간이 그 생명을 소비하면서 결국 죽어간다(극에서 화폐의 가치는 바로 생명과 동일해서 카드를 긁으면 생의 시간이 줄었다.). 돌려막기를 방지하기위해 직계존비속끼리는 서로 빌려줄 수도 없고 '신'과 같은 존재인 장로로부터 허락을 받아야했다. 어릴때 부터 돈굴리는 재주가 남달랐던 주인공이 빚더미로 죽게될 아버지를 위해 장로에게 찾아가 허락을 받지만 그곳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젊음을 유지하며 살던 한 여자를 만나고 그녀를 통해 바로 '숲'과 '나무'에의 투자를 권유받고 결국 가족에게는 돌아가지 않는다.

 얼마 전 「맨 프럼 어스」에서 처럼 사실 인간은 영생할수 있는 무궁한 존재로 태어났을 수도 있다. 주기마다 완벽한 재생을 이룰 수 있지만 환경적인 요인. 인간이 스스로에게 행하는 것들 먹는것들에 의해 오염시키고 오염된다. 결국 살기위해 서로 먹어야 하는 최후의 순간은 우리가 살아서 맞이하게 될지도 모를일이다.

 

 



 

  푸줏간 주인 끌라베의 통제는 굉장히 훌륭하다. 고기에 굶주린 사람들은 언제나 금단현사의 끝까지 가서 살인이라도 날 판에야 식용으로 끌어들이는 하숙생들을 잡아 내어놓는다. 노모를 죽여 고기로 먹고자 하는 아들. 심약한 사람에게 배관파이프를 통해 자살을 종용하는 '신'의 목소리인척 하는 세입자등 하루하루의 삶이 그야말로 먹고 싸기 위함이다. 물건, 특히나 식량을 운송하는 엄청난 직무를 맡은 집배원에게는 '우편법 제20조'란것이 있어 누군가 우편물을 강탈하려하면 총으로 쏴버릴 수도 있다. 겉모습은 그래도 사람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만 원초적인 모습 그대로이다. 이런 무법의 지대에 본인의 뱃속도 채우고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가졌다면 단연코 유윈이다.

 



 

 어느 세상이나 무릇 '사람'이라면 반목하는 집단은 있다. 「언더그라운드」로 들어와 산다는것은 역사속의 패배자임을 증명해준다. 고기를 못먹어 힘이 없어서일까. 채식주의자 인간들이라 하여 어떤 육식동물과의 정치적 반동관계는 아니다. 다만 묘하게 먹이사슬이 형성되어 서로 혐오할 뿐. 콩과 옥수수등을 찾아 해메이는 지하인간들은 지상인들의 사냥감이 되어 먹히기 일수다. 지역적 핸디캡이 있긴 하지만 '지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이들 역시 누구도 경작에의 연구는 하지 않는다. 기묘한 먹이사슬까지 생성될 정도라면 아마도 이들 역시 초기의 지하인은 아닐것이다. 누구로 부터 시작되어 이어진 퇴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수히 많은고대문명의 유적들이 미스테리만 남기고 지금의 우리들에게 발견되는것을 보면 혹시, 인간들은 이런 퇴보의 시간을 여러번 거치면서 자신들의 유구한 역사를 잊게 된것은 아니었을까?

 

 

■ My name is HM! 희 망~이

 



 

 사랑이 밥먹여 주진 않는다고들 하지만 모든것을 거두 절미하고 결국은 사랑이 밥먹여 준다. 여성이 이성에게 느끼는 모성애의 첫번째 신호가 어쨌든 밥해먹이기 아닌가.  밥은먹었니? 왜 밥도 안먹고 다녀? 이니. 이렇게 재고 자르는 세상이 아니라면 깊이 삽질하는 JM(절망)속에서는 남과 여의 사랑만큼이나 HM(희망)이 없다. 델리카트슨의 세입자들에게 '상주 인부'의 명목으로 입주하는 하숙생 뤼종은 제발로 들어오는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지만. 끌라베의 딸 줄리와 사랑하게 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 하는 것이다.

 



 

 용기 없는 자를 저돌적으로 만들고 모든 부조리에 맞서게 하는 힘. 암울한 세상을 밝게 만드는 힘이 또 사랑입네 하고 역시 영화에서도 이야기해주지만 죽음에 까지 맞서야하는 현실이 참으로 처절하다. 혈육임에도 결국 서로 죽이고 숭고하게 살아남아야하는 비극적인 세상이지만 아름답게 완성된 줄리와 뤼종의 사랑은 두 사람의 첼로와 톱 연주와 이를 따라하는 이웃집 꼬마들 처럼 순수하고 때묻지 않음을 보여준다. 혹은 새로운 시작. 어쩌면 이 음악가와 곡예사 커플로 인해 사람들은 축사도 만들고 농사를 짓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 인생이 블랙 코메디

 

 사람을 먹는 델리카트슨의 사람들이니 고어물까진 아니어도 움찔움찔 할만한 장면들이 있다. 직접적으로는 뤼종의 부메랑 칼이 머리에 꽂히는 끌라베의 죽음이라던지 서슬퍼런 고기칼이 문도 부수고 사람들과 우우 몰려와 눈에 불을켜고 인육을 부르짖는모습은 공포와 엽기 그 자체이지만 이상스럽게도 우습다. 끔찍해 하는듯 하다가도 웃게되고 이런 심각한 판국에 왠지 엉뚱하고 웃음이 터져나온다.

 



 

아놔 나도 비명지르고 웃다 쓰러졌던 장면.

 

 장 피에르 주나와 마르크 카로의 이 기발한 상상력과 스토리텔링은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에서도 여지 없이 드러나는데 왠지 더욱 잔인할것 만 같은 제목 「델리카트슨」이 더욱 즐기기에도 가볍고 단순하고 화끈한 메세지가 좋다. 일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의 완성을 위한 워밍업같은 느낌도 들지만(그러기엔 이 영화 역시 훌륭한 짜임의 스토리텔링이지만) 간편하게 액기스만 맛보고 어두운배경의 유쾌한 결말을 느껴보는것도 무척 좋다.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에서는 조금 더 정신없을 수 있지만 여전히 음침한 조명이지만 왠지 엉뚱하고 유쾌한 색감과 왜곡과 비약이 넘쳐나는 카메라 연출의 맛을 느낄 수 있고 팀버튼과는 또 다른 묘한 신세계를 만날 수 있다.

 



 

 엉뚱한 상상과 유머와 함께 등장인물들을 간략하게 소개해주는 역할까지 하는, 그 유명한 비트박스(?)씬 ㅋㅋ

 

 장 피에르 주네는 에일리언4의 메가폰도 잡았는데(전편이 워낙 강하여 억지로 만들었단 평은 들었지만..) 그가 아껴 마지않는 론 펄만과 도미니끄 삐뇽을 영어대사와 함께 만날 수 있다. 그것도 죽지 않는 인물로.

 마르크 카로는 2007년 솔로로 「단테01」으로 우리와 만났지만 옆에 중재자(장 피에르 주네? ㅋ)가 없던 탓인지 자신의 세계로 빠져들어 관람자를 무척 어렵게 만들었다. 관객이 무척이나 성실하고 충실하게 감독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주고 정성들여 메세지를 찾아주어야만 마르크 카로임을 애해해줄수 있는 영화일 것이다. 아무래도 두 사람의 콤비는 마르크 카로의 멋진 상상력과 철학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라도 다시한번 필요한 것 같다.

 

 아무리 예술이라도 영화 자체 탄생의 의의는 아무래도 소통에 있는 것이니까.

 

 


델리카트슨 사람들 (1992)

Delicatessen 
7.9
감독
장-피에르 쥬네, 마르크 카로
출연
도미니크 피뇽, 마리-로르 두냐크, 장 클로드 드레이퍼스, 까랭 비야, 티키 홀가도
정보
코미디, 판타지 | 프랑스 | 93 분 | 1992-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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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드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