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장(The Station Agent,2003)

*이미지출처-네이버 영화
2003년 내 생에 최후의 한량이 시절에 반드시 누리겠다고 필수코스로 지정한것이 부산국제영화제였다. 본가도 부산이고, 마침 휴학중이니 부산에 죽치고있고,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하면서 개막작을 보겠다고 완전히 용을 썼다. 당시만 해도 인터넷 결제니 이런게 그렇게 잘 되어있지 않아서 부산은행계좌로 입금을해 사이버 머니를 만들고 그것으로 예매를 해서 방문발권을 받는 시스템이었는데, 영화제가 이렇게나 커질 줄 몰랐던 나는 실컷 광고하던 영화들은 하나도 예매하지 못하고 카달로그 다 뒤져 그래도 보고싶다던 두편을 골라 보았는데 그 중 하나가 「역장」이다.나머지 하나는 '커플'이 아니라 '싱글'로 시도했기에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개막작 「도플갱어」 순간 매진 예매성공에 비명을 질렀으나 정작 영화도 별로, 관객매너도 별로여서 정말로 가슴을 쳤다.
역장 이라고 생각하고 검색하던 중 2006년 국내 개봉의 흔적이 있는데 그냥 제목을 「스테이션 에이전트」라고 썼더라.( 뭐 역장도 괜찮은데 왜?) 당시 아무 생각없이 카달로그도 제대로 읽지 않고 들어갔다가 의외의 획득에 아주 만족스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앞좌석에서 머리 붙이고 커플질 하느라 스크린 자꾸 가리던, 짜증나는 관객에게 한마디로 "대가리 크네"라고 탁 쏘아붙여주는 오타쿠가 옆에 앉아서 무척 고마웠다. 1000ml서울우유를 들고 와서 뜯어 마시면서 심도있게 영화에 빠져있던 그남자는 "대가리 덴마크네"라는 그 간단한 한마디로 그들을 떨어지게하고 영화가 끝날 때 까지 단 한번도 그들이 머리가 붙지 못하게 했다. 나는 그남자에게 우유를 사주고 싶었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 잔치집이 시끄러워 뒷방에 숨었더니 예쁜 딸 순이가 있었네
미국하면 대형 제작사와 하청과 하청을 거듭한 노동력 착취의 특수효과(오우, 이렇게 말해서 미안) 진득한 영화들만 생각하고 있던지라 「역장」은 매우 신선했다. 영화제 당시에는 선댄스영화제에서 각본상과 관객상, 그리고 주연배우 패트리샤 클락슨이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상태였고 그 후로 2004년에도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탔다. 당시 불붙기 시작했던 아시아영화에 대한 고찰로 약간은 뒷방에 물러나 앉아 아침 10시대 라는 무척이나 인기없는 상영시간을 잡았지만 괜찮았다. 큰 수확이었다.
조용하게, 그저 남들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척 자신이 먼저 무시하고 사는 남자 핀(피터 딘클리지). 유일하게 소통하는 친구 헨리의 죽음으로 같이 운영하던 장난감 가게도 접게되고 유산으로 남겨진 시골 간이역 관사(로 추정되는)에 들어가 살게 된다. 친구에게 유산을. 정말 멋지구나. 여기서 열연하는 피터 딘클리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현역배우다. 놀랍도록 잘생긴 얼굴과 듣는사람들 앉아서 수근수근 하게 만들었던 끝내주는 목소리 때문에 영화에 몰입도 100퍼센트 상승시킨다. 최근에 그를 본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나니아 연대기-캐스피언왕자」에서 바로 트럼킨. 엘리아 우드 처럼 특수효과냐 아니냐 귀엽다 말들이많았지만 그는 실제로 왜소증이며 진짜 배우고 정말 끝내주는 눈빛과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나니아 연대기에서의 트럼킨. 분장에 가려져있지만 그의 눈빛만은 확실하다!
어쩌다 보니 친구가되는 세 사람. 핀과 아픔이 있는 올리비아, 수다 99단인 조. 이쯤 되면 관객은 뭐 우정을 통한 공감대를 형성하겠거니 예상한다. 올리비아 역의 패트리샤 클락슨은 이 때 처음 알게되었는데 앞서 포스팅한「엘레지」에서 주인공 데이빗의 20년지기 침대파트너 캐롤린으로 나온다. 보자마자 그녀에게서 풍겨나오는 근원적인 슬픔. 완전히 누가보아도 보호본능을 일으킨다. 나이가 들 수록 빛을 발하는 그녀의 알수없는 우수는 '불혹이 넘으면 눈빛에서 사람의 성격이 드러난다'는 말에 따르는 내 입장에서도 전혀 변화가 없다. 분명 초심이 그대로 남은 배우일 것이다. 자식을 잃은 슬픔이 있는 올리비아는 그 고통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데 자신이 가장 불행하다고 느꼈던 핀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자 단호하게 대꾸한다. "그런 동정하는 눈으로 보지 말아요" 핀의 당황. 관객의 당황. 자신이 남에게 동정을하고 그로인해 남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는 급작스러운 깨달음. 그들의 관계가 어떤 '호의'나 '동정' 이 아닌 그저 자신만이 아프다고 느끼는 이기심에 기인한것 임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서로를 동정하지도 않고 애써 위로하지도 않는다. 흔히 '장애가 있는 친구와의 우정' 이딴식으로 오버된 이타심을 강요하는 드라마가 아닌것이다. 황당하기는 조도 마찬가지다. 역 앞에서 햄버거 노점을 하는 그는 이사오는 날부터 끝도 없이 수다를 쏟아낸다. 그 역시 '신기한 사람이 왔다'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단순히 자기의 수다일 뿐이다. 끝 없이 수다를 떨고 어쨌든 풀고 어쨌든 만나고 누구라도 발을 잡고 수다를 떨어야 되는 조도 그냥 자기 친구를 만드는 것일 뿐 지극히 높으신 배려심이나 고차원적인 우정을 원하거나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이런것이다.
파격적으로 멀리 여행을 떠난다거나 일상으로의 탈출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동네에서 미적미적 노는 친구들. 놀아도 조용한 핀과 올리비아, 혼자 투털투털 하면서도 잘도 따라오는 조. 올리이바 까지만 있었다면 독립영화제에서 감독의 경력으로만 남을 수 있었겠지만 죽도록 떠들어대는 조 덕에 선댄스에 올랐다. 관객들은 분위기에 젖으려고 하다가 끊임없이 조 때문에 웃는다. 조 역할의 바비 케너베일은 작년 개봉한 공포영화 「100피트」에서도 볼 수있다. 그외에도 여러 코메디영화와 스파이크 리의 영화등 다양한 영화에서 만날 수 있다.
핀을 미소짓게한 아가씨 에밀리. 이 아가씨의 등장부터해서 핀이 웃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관객들 완전히 살인미소에 오~라고 구석에서 웅성웅성하기도. 이렇게 굳은 얼굴과 살인 미소를 동시에 가진 남자와 어리고 순진한듯 안순진한듯 순진한(??)아가씨. 몇 년 후 미셸윌리암스를 보았을 때 도대체 내가 어디서 보았나 머리를 쥐어 뜯었는데 아, 하고 생각이 난다.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알았던 사람이 많다. 아닌게 아니라 그 전의 그녀가 나온 영화는 한편도 보질 않았네. 스피시즈를 제외하고는(아역출신이구나.)
● 커플을 물리친 목적의식. 영화제에는 솔로부대가 많다.
「도플갱어」로 더러워진 마음을 이 영화로 씻고 용서 해 주었다.' 고 예전 내 홈페이지에다가 적은 적이 있다. 강제로 감동을 조장하는 휴먼드라마를 무척이나 싫어하기 때문에 항상 '진짜 드라마'와 '진짜 로맨스'를 원한다. 파격을 찾고 일탈을 찾기에는 너무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이 그래도 이런것도 나쁘지 않구나 라는 조금은 열린마음을 갖게 되는 영화. '꿈꾸는 삶' 이 아니라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삶'을 이야기해 준다. 「역장」의 표는 당일에도 잔여분이 많아서 현장매표도 많았다. TV에서 거론된 수많은 작품들에 비해 관심 밖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영화제의 특성상 심심풀이 보다는 목적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많아 관람매너는 완벽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뽀뽀하러 들어왔던 커플 우유 오타쿠가 물리쳐주었고 엔딩크레딧 끝날 때까지 단 한사람도 일어나지 않았다. 연극의 피날레 처럼 터지는 박수는 관객도 흥분시킨다. 배우도 감독도 없는 자리 우뢰와같은 20분의 기립박수 그런 것에 비할 바는 못되겠지만 불이 켜질 때 까지 끝나지 않는 박수는 '바로 이런 공감대를 위해 영화제를 가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새삼 느끼게 해 준다.
아침부터 전 세계의 노숙자들이 엎어져 침흘리고 자고있는 맥도날드의 그 맛없는 커피(맥카페는 맛이 없단말이다. 아무리 변명해도)로 고픈 배를 달래고 상영이 시작될 때 즘 좀비처럼 일어나는 노숙자(물론 영화제 구경온 관광객들.)들과 우루루 몰려 PIFF광장으로 들어가던 때가 생각이 난다. 예매한 자 만이 누릴 수 있는 빠른 입장(후후) 업무차 온 사람들인지 부부인지 정말 므흣한 관계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열너댓살 정도 차이가 나보이는 인본인 남녀의 스냅을 찍어주고 인도인의 사진을 찍어주고 제레미 아이언스의 등짝을 나도 모르게 만져보고 양조위와 정면으로 눈 마주친(심장마비!!!) 추억이 있던 부산국제영화제. 연차도 못내는 회사때문에 영화제 방문은 이제 점점 더 멀어지고 자동으로 부천도 스케줄 안맞을테고 올해 전주도 놓쳤지만 내년부터는 다시 좀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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