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키루(生きる,1952)

*이미 출처 - 씨네21
나의 포스트 카테고리중 잡설을 적어놓은 묶음 "삶은=계란이다"는 나의 나름대로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다 -ㅂ-;; 계란은 날계란이다. 유정란이든 무정란이든, 우선 생명을 갖고 태어나기위해 난 것 이므로 바로 삶이다. 하지만 우린 먹기위해 그것을 삶는다. 병아리가 되기위해 태어난 알이 병아리가 되지 못하고 그대로 삶겨 죽어버린다. 그렇지만 결국 우리는 살기위해 이 완전식품 계란을 한번 잡솨 주신다. 계란은 닭이 되지 못해 죽은것인가 나를 살리니 산것인가. 그야말로 삶은 계란이다.(아주 그냥 궤변의 끝을..)
대학교때, 나를 아꼈다고 (나)혼자서 자부하고있는 시간강사 장선생님은 어떤 수업이든 구로자와 아키라를 이야기했다. 본인이 표현주의를 전공한것이 영향일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실기 수업이든 이론수업이든, 색채수업이든 현대미술사든 무조건 구로자와 아키라이야기는 항상 무엇을 표현하든지 나왔다. 그럼에도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는 7인의 사무라이 밖에 보지 못했다...라기 보다는 안봤다. 스승이 그정도 이야기했으면 볼만도 한데 말이다.
역시 수박 겉핥기 식인 나의 과잉정보들 중에 기억에 남는것이, 그가 어떤 상을받고(깐느였나..워낙 많이받아서..)우리나라 기자였나..평론가였나..
가 오래전 상을받은 한 작품을 언급하며 질문하길 '감독의 이런 활극영화들이 서구가 아시아를 바라보는 시선을 한정? 짓게 하지 않는가, 이정도로 생각하게 만든다고 보지 않는가' 뭐 대충 이런식의 질문을 했다(아, 정확치 않다. 누가 아시는분 좀 정확하게 말해주시오) 그 질문에 대해 "나는 젊었고 그 상이 꼭 필요했다."고 대답했다. 뭐 도스토옙스키원작「백치」를 만들때, 영화를 너무 길게 만들어 편집을 해도 두시간이 넘었는데 "더 자르려면 필름을 세로로 잘라라"고 했던 말 보다도 더 나에게는 쿨하게 박혔다. 서구에서 볼때는 구로자와 아키라가 "7인의 총잡이 원작자"정도로 여겨질지라도 그는 개의치 않았을 것이며 실상 또박또박하고 남성적인(?) 그의 작품보다도 훨씬 섬세한 계산이 속에 잠재되었을 것이다. 내가 「7인의 사무라이」 로 시작해서 「라쇼몽」과 「이키루」로 이어졌듯이 서구의 시선은 그의 오리엔탈리즘 가득한 활극에서 실존적의미를 담뿍 내포한 다른작품들로 눈을 돌렸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대중성에 있어서는 그렇다.
「이키루」에서 이야기하는 삶은 내가 추구하는 바와도 무척 비슷하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종교나 신앙에 대한 이해가 오해로 많은 변질이 된 요즘 같은 세상에, 신이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말은 잊은 채 읽고 믿으면 해결된다는 과잉의지 지향의 품성이 과도하게 양산되어 참 뜻은 사라지고 도구로 잘못 사용되고 있는경우가 허다하지 않는가. 신이 있고, 내 삶의 기준을 정해준다 하더라도 스스로 이겨내고 자신이 가치를 찾아내고 행하지 못한다면, 배운것에서 스스로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가 신의 진리를 따르는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우상이다.
영화는 아주 단도직입적이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스타일이다. 시청 시민과의 과장인 주인공 남자 와타나베는 시간만 때우는 주먹구구 행정 공무원의 장본인이다. 세월만 흘려보내는 그에대해 화자는 그냥 대놓고 산적이 없고, 살아있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흑백영화에서의 눈아픈 영상표현 없이 직접적으로 시작해주는 이야기는 영화의 제목 만큼이나 직접적이고 부가설명이 필요 없다.
현재도 전이와 치사율이 가장 높은 위암으로 그는 곧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게되고 애지중지 키워온 외아들의 이기심에 실망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지만 도무지 '사는 방법'을 모른다.
도박과 향락으로도 자존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던 와타나베는 시민과에서 근무하다가 퇴사하고 인형공장에 다니던 오다기리에서 젊음과 활력을 느끼고 졸졸 따라다니면서 살아있는 느낌과 활력을 배우고 싶어하고, 그 좋은 공무원 신분 갖다 버린 그녀가 공장에서 인형을 만들면서 느끼는 기쁨을 듣고 '힘만 있다면' 자신도 무엇이든지 할수있다는 깨달음. 그야말로 돈오(頓悟)를 얻는다.
빠짐없이 등장해주시는 구로자와 아키라의 유머러스한 상징. 단지 '미이라'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삶에 활력이 생겨 자리를 박차고 나온 와타나베, 그 뒤로 'Happy Birthday to you'를 부르는 군중이 몰려든다. 물론 그들은 진짜 일행이 기다리고 있던 주인공을 향해 불러주고 있는 것이지만, 와타나베의 새로운 탄생, 진짜 삶을 얻음을 알려주는 상징이다.
그가 시간을 때우는동안 한 마을의 쟁점으로 떠올랐으나 방치해 두었던 민원 '웅덩이 매립'건을 들고 그는 마지막 짧은 생을 불살라 아이들을 위한 공원을 건립한다. 그리고 그 공원에서 쓸쓸하게 얼어죽은 채로 발견된다.
그저 감동적인 이야기로 끝을 맺을 것이었다면, 그냥 영국 로맨틱 코메디를 보거나 내가 볼 때마다 행복해 마지 않는 「당신이 잠 든 사이에」를 보면 될것이다. 하지만 와타나베가 주인공임에도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와타나베의 마지막 삶이 실존주의를 담은것이었다면 어느정도 니힐리즘을 담은 그의 사후가 있다. 주민들도 알고 공무원들도 다 알고있는 와타나베의 공로는 살아남은자들의 공치사와 나눠먹기로 묵살당하고 약한 민초들만이 그의 진짜 공덕을 알아주고 눈물 흘린다. 영웅의 사후, 또는 스쿠루지의 깨달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남겨진 사람들의 행태는 그야말로 단 한사람도 살아있지 않다. 와타나베의 빈소에서 치루어지는 사람들의 대화와 행적은 죽기 전 그의 행로만큼이나 적지않은 분량으로 감독의 이야기에 담겨있다. 와타나베의 순간 살아있었던 시절을 이야기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과연 얼마나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삶을 이끌어 가고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은 실존주의 사조와 그것에 의거한 삶에 대해 '무신론적이다' 라고만 이야기한다. 신의 실체에대해서는 단 한사람도 논할 수 없을것이고 '믿을교리'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신을 내세워 자신을 애써 모독할 필요도 없다.(성당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펄쩍펄쩍 뛰겠지만 나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 다분히 환경적 요인으로 점차 염세적으로 빠져들었던 쇼펜하우어(근데 책이 참 재미있단말이다.)의 극단적 예를 들어 이후 실존주의 학자들이 말하는 신에 대한 논거를 무신론과 허무주의와 신성모독으로 치부하기에는 자신이 공부를 너무 덜했다고 느끼지 않는가. 실존주의에서는 신을 부정한다기 보다 신과 맞선다고 이야기 하는 쪽이 맞을 것이다. 인간이 변증법적으로 얻어낸 진리, 기초가되는 그 '절대지(絶對知)'가 반드시 신의 의미가 아니라는것이다.(이건 또 내 멋대로 해석이다. 학위 없는 사람이니 그냥 흘려들으시오..) 그 중에는 무신론으로 결론을 맺은 사람(사르트르처럼)도 있고, 그냥 궤변으로 날리고 자살로 마감한 사람도있다. 후자는 종교계의 진리에 대한 오해가 만연한것 처럼 실존이란것에 대해 과잉대응 한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도 해본다.
'살아있다'라는것을 와타나베처럼 '무언가 열정적으로 한다' 라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오다기리가 인형을 만들면서 즐거움을 느끼면서 와타나베에게 '무언가 만들어 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는 시청에서 무얼 만드냐고 대답한다. 그것이 오류다. '만든다'는 행위 자체가 살아있다는것이 아니다. 자신의 지금 시간을 멍한 상태로 흘려보내지 않길 바라는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밥먹을 때도 열과 성을 다하라는것이 분노의 숟가락질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듯이. 당신이 직업이 없고, 아무것도 없는 이 순간에도 당신에게 의미 있는 일이 있다. 사소하게 스트레스를 풀기위해 노래방에 들르는것이나 만화책을 읽을 때 더 또렷해지는 정신을 느끼지 않는가. 의지박약으로 치닫는 자신의 하루중에 단 한순간, 나를 즐겁게 하는 드라마 한편이나 노래 한 곡이 있지는 않은가. 그 때 당신은 한없이 상호작용하고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저 일주일에 한번 좋은말이란 것을 외우고 머리에 집어넣고 무한 의지 하는것이 진리로 충만한 순간이며 무의미하고 성의 없는 자신의 대충인 생활을 무조건적으로 정화해줄테니 실생에 다른것은 후자로 미루어지고 어떻게 되어도 좋다라고 느낀다면 글쎄. 신이 인간에게 가르쳐 주고자 했던 진리가 그런것은 아니었을텐데. 나 스스로 일어서고, 배운 진리를 실천하는것이 무신론자나 유신론자나 누구에게나 통하는 실존의 의미일것이다. 결국 '신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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