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Tokyo!, 2008)
*이미지출처-네이버 영화+α
봉테일 봉선생이 미셸 공드리와 레오 까락스와 같이 디테일의 반열에 올라와있음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계획했던 마더 조조관람을 만성피로증후군으로 놓쳐버리고 머리를 쥐어 뜯다가 그 마음을 달래기 위해 집어든 「도쿄!」는 어느정도 나를 위로해 주었을 뿐 만아니라 정말로 '훑어 보려고'만 했던 공드리와 까락스 사마의 것 까지 몽롱하니 느끼게 해주어 참으로 다행이다.
「수면의 과학」리뷰를 포기해서 난감하던 찰나에 만나게된 공드리 사마는 어찌나 또 간결하게 그만의 몽롱함과 여성성, 분명 뭔가 연애의 최고 경지에 이른것인지도 모른다는 존경심이 물씬 풍겨오니 이정도 수확이면 정말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고있다.
언제나 무엇을 보아도 어려워서 죽을것만 같은 레오까락스, 그 어려움을 단편으로 잘라주어 무척이나 다행이지만 역시 어렵다. 하지만 어느정도 그의 세계가 변하지 않았음은 그야말로 "짠밥"이 제대로 먹히고 있음이며 데이빗 린치와 카일 맥라클란, 팀버튼과 조니뎁 처럼 영원한 콤비 레오 까락스와 드니 라방은 단 30초분량의 광고를 찍는다 해도 언제나 피를 토할 것이다. 절대로! 배우가 되기위해 태어난 남자 드니 라방의 전위적인 연기를 보고있노라면 숨이 멎는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 이해의 척도. 그런것들이 무척 어렵다. 하지만 그냥 보이는데로 봐주는것, 그리고 마음대로 꿀리는데로 만들어 주는것이 옴니버스 영화의 매력이 아닌가. 나도 한번 꿀리는대로 훑어 보았다.
▒ 아키라와 히로코 - 미셸 공드리
미셸 공드리가 이야기하는 남자와 여자의 좁혀지지 않는 관계는 어떻게 해서든 방법이 있다. 굳이 '하나가 되라고'외치지 않는 그는 항상 남녀의 "공생(共生)"방법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답이 없이 느껴지는지도 모르지만. 여자는 여자의 방식으로, 남자는 남자의 방식으로 함께 살고있다. 그의 다른 작품에 비해 많은이들이 공감하고 감동하기도 했던 「이터널 선샤인」의 경우도 공생해야함을 깨닫지 못하는 남녀의 이야기다. 미국식의 전개와 대배우들의 호연으로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에 더욱 쉽게 접근했을 뿐 다른 작품들과 전혀 다른이야기가 아니다. 「이터널 선샤인」은 남녀의 재회와 열린 앞날로 사람들에게 더욱 가깝게 이야기하였을 뿐이다. 관객은 뻔한 이야기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진부하지 않은 그의 생각에 크게 공감한다. 그는 소통을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통한다. 소통을 "같은 생각을 하는것"으로 크게 오해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각자 서로의 필요를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 그가 존경스럽다. 나는 한 수 배우고 싶다. 여담인데 내가 좋아하는 나랑 너무 똑같이 생긴(젠장) 잭블랙이 나오는 「비카인드 리와인드」도 재미있다. 코미디인줄 알았더니 감동에 눈물 찔끔하게 하다니 재수가 없잖는가.
잡담: 여주인공 후지타니 아야코는 스티븐 시걸과 후지타니 미야코 선생의 딸이다.
「아키라와 히로코」는 촌년놈 이야기다. 훗카이도에서 독립영화를 만드는 애인따라 무작정 도쿄로온 히로코. 글쎄 예술가란 자의식이 무척 강한사람. 그들은 항상 헌신적이고 예술이 아니어도 자신을 감싸줄 반쪽을 원하지만 그와 동시에 상대방도 자의식이 강하길 바라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자신처럼 자책하거나 자학하지 않으면서 무조건적으로 따뜻하게 대해주는 상대를 좋아하지만, 반대로 자신에게만 기대는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따뜻하고 자의식강한. 주체성이 있는 그런 상대를 원하는 그런 완벽주의는 남자든 여자든 대부분의 예술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집착에의 자유를 대리만족으로 느끼면서도 간혹 그것을 한심하게 느끼기 까지 하니 예술가는 이기적이다. 앞서도 언급했든 모두들 "이외수의 마누라 같은" 상대만 원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신의 세계에 푹 빠져있는 이기적인 예술가의 옆에 항상 같이 있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한번 생각해 보아야한다. 그들이 순수한 사랑만으로 졸작이든 걸작이든 당신의 예술을 같이 사랑해주는것 자체만으로도 그들의 주체성과 포부는 이미 큰 결심이 되어있는 사람이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고마워하고 조금이라도 잘 해주자.
도쿄에서의 성공적인(?)상영회, 그의 구질구질한 뒷바라지는 다 해주지만 막상 성공아닌 성공앞에 뒤로 물러서 있어야 하는 히로코. 화가와 사귀어 본적 있다는 관객의 자조 섞인 위로에 자신의 처지가 즉각적으로 처절하게 다가온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최고의 관객이었던 반려자이지만 자신 역시 그의 예술에 손톱만큼의 영감이나 박카스 따위에 지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밀려온다. 나도 예술한다고 설쳐보고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랑 사귀어보고(그런 놈만..)다 해보았지만, 아무리 내가 주체성을 가지고 나의 포부를 가지고 있어도 이런상황은 참 난감하다. 그녀가 같은 예술가였다면 밟아버렸을 거다. 포부를 더 살려서 예술가로서 밟아 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친했던 친구로부터도 쓸모없다는 소리를 들어버리고 이렇게 된 상황에 자신의 존재의 이유에 더더욱 의문이 생길 뿐이다. 나는 나를위해서도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았던 것인가.
미셸 공드리는 여자가 아닐까. 여자일까. 어떻게 여자의 마음일까. 예술가의 반려자는 그렇다. 언젠가 서점에서 한국 유명 화가들의 아내들에 대한 책을보았다. 한결같이 보이지 않는 내조와 전공자를 뛰어넘는 공부의 결정체다. 그 땐 스무살 남짓해서 왜 그렇게 사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잘나도 내 남편이 잘난거지 내가 잘난게 아니기 때문이다. 남편 잘남을 내놓고 으스대고 사는 그런 꼴은 너무 싫다. 하지만 그들이 책에 나온이유는 으스댐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생각한다. 그들의 선견지명을. 폴락의 부인으로 유명한 리 크라스너가 그러했듯. 나의 투자보다. 이사람의 미래가 더욱 찬란하고 확실하고 가치가 있다고 느껴진다면 단연코 승산이 낮은 나는 포기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후원자가 된다. 최고의 예술가를 만들어 낸다. 힐러리 클린턴이 그랬다. 우연히 빌 클린턴과 들른 주유소에서 오래전 사귄 남자가 일하고 있는것을 보았다. 빌이 으스대며 나랑 결혼하길 잘했지? 라고 하니 코웃음 쳤다지 "내가 쟤랑 결혼했으면 미국의 대통령이 바뀌었겠지". 당신의 반려자는 그렇다. 의자에 앉아 벤조를 치는 아키라가 의자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듯. 옆 사람의 존재는 있는듯 없는듯 하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 알리라. 떠들썩 하니 요란 떨던 사랑보다 있는것이 당연한 그 존재가 가장 절실하다는 것을.
▒ 광인(Merde) - 레오 까락스
레오 까락스는 섣불리 이해하려고 들다가는 크게 다친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의 인상이 강해 항상 그의 기억은 흑백이다.
그의 상징을 억지로 찾으려고 들지 않는것이 건강에 좋다. 보고있으면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의 이해가 일어나고 나의 해석이 일어난다. 불쾌하고 구슬프고 우울한 그는 김기덕과는 또 다르게 우울하다. 김기덕의 짝궁 조재현 처럼 항상 그의 편에서 이야기 해 주고있는 드니 라방이 없었다면 레오 까락스의 세계는 태어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관객도, 출연자들도 감을 잡을 수 없고 생각을 할 수도 없고 개념잡을 수 없는 하수도의 광인(狂人) 메르드. 꽃을 먹는다. 꽃만 먹고 사는 남자. 드니라방의 전라의 연기는 영화로 만나선 안될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나의 연극 무대 같다. 메르드는 순수인가. 야성인가, 악인가, 인간인가, 신의 사자인가.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인정해야 할 것인가. 인간의 부끄러운 마음, 억눌린 마음이 어둠속에서 뭉쳐 태어난 악마인가. 그를 제거해야 하는가. 과연 감독이 하고싶은 말도 그것인가. 아무렴 어때 라는 말인가. 그렇다. 아무렴 어때.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는 광인 메르드, 왼쪽 눈이 보이지 않는 붉은 수염의 변호사 볼란드. 그들만의 이상한 언어 소통. 왼쪽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심판하는 메르드. 오른쪽 눈으로 그를 향한 심판에 맞서는 볼란드. 그들이 만나 비로소 하나의 완전체가 된다. 그 둘은 하나였을 것이다. 악인지 선인지 존재를 알 수 없는 모호한 볼란드. 메르드의 왼 쪽 눈은 그만의 본능과 계시로 결단하고 심판하며 볼란드의 오른쪽눈은 이성과 언어로 그를 대변한다. 볼란드는 보이지 않는 자신의 왼쪽을 그를 통해서 찾아 완전한 자신에 만족했는지 모른다.
수류탄을 던지며 무고한 도쿄시민들을 학살한 메르드. 그가 자행한 학살에 대해 "난 죄 없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라고 이야기한다. 볼란드의 오른쪽 눈을 가지고 야만성은 어딘가 깊숙히 숨겨둔 서방의 발달된 이성세계는 어딘가 멀리 다른 타국에서, 혹은 더욱 나쁘고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지만 깊이 숨겨둔 그들의 기본 제국주의와 학살의 정신은 아직 동방이나 미개한 어디에선가 다른 왼쪽눈으로 활개치고 있다. 여기까지 생각했다면 역시 나는 레오 까락스에 대한 부담에 시달리고 있는것이 분명하다. 단지 그는 여기까지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메르드는 똥덩어리다.
우리 아버지의 명언이 생각난다. "전쟁은 나도 되지만 나는 죽으면 안된다, 지구는 멸망해도 나는 죽으면 안된다." 인간이 싫어서 죽였다면 당신의 자식이나 주위사람을 죽이지 않았는지 열변을 토하는 검사. 단순하다. 남은 죽어도 난 살아 있는 게 좋다. 자의든 타의든 살인을 저지르는 자는 결국 자기가 죽는것이 싫어서다. 메르드는 처형당한다. 그렇지만 죽지 않았다. 치사하게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판도라의 상자에 구겨넣어 자물쇄를 천개를 채워도 인간은 숨길 수 없다. 지금도 자행되고 있다. 메르드를 제거하고 싶어하지만 사실 모두 자기만의 메르드가 있다.
▒ 흔들리는 도쿄 - 봉준호
우리 봉테일이 작품. 상당히 일본적인 영상이 조금은 놀라웠다. 살인의 추억 촬영을 위해 우중중 꾸지리한 날씨를 기다리느라 똥을 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장화홍련에서 느껴보지도 못한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우울함과 가슴에 와닿는 그 색감으로도 독한놈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나에게는 항상 풍신수길이(NHK「토시이에와 마츠」에서 도요토미 역할을 했었다. 키가 작아서라는 설이 유력)로 먼저 기억되는 카가와 테루유키가 봉준호에 대해 침을 튀기면서 칭찬을 하고 난리난리 였는데 모르긴 몰라도 정말 좋은가보다. 예의상이라고 하기엔 너무 침을 튀겼던것 같다. 여하튼 캐스팅에 있어서 한치의 실망을 주지않는 봉테일이기에 조연 한사람(다케나카 나오토)도 미칠것만같다. 세 영화중에는 가장 가볍고 젊은 듯(나이도 제일 젊어)하면서 비교되지 않기위해 애 쓴 흔적이 보인다. 그래서 더욱 잘한것이 굳이 어렵게 이야기 하지 않아서 잘했다. 단순한 메세지가 봉 답다. 송강호의 "논뚜릉에 꿀발랐나"같은 중간의 코믹요소가 좋다. 하지만 역시 짠밥은 딸린다. 두 감독의 짧고 굵은 호흡사이에 조금은 구름을 잡고 있다. 하지만 직접적인 소재(히키코모리)와 공감을 주는 메세지(물론 사랑)은 레오까락스가 깊이 삽질 해 놓은 땅에 씨앗을 뿌린다. 옴니버스는 비교도 문제지만 다른 이야기라도 관객에게 이야기하는 무게로 순서를 정하는것 또한 무척이나 중요한 것 같다. 그 무게가 확실히 느껴지게 만들어 괜찮았다.
히끼꼬모리인 남자. 다행이다. 그는 마구 살지는 않는다. 혼자의 생활에서 병적으로 정리하고 청소하는 남자.책이란 책은 다 읽고 정리하고 먹은 피자상자를 모은다. 집이 천국이다. 내가 복권에 당첨되면 이렇게 살리라고 생각했던것을 그대로 살고있다. 다만 돈은 히끼꼬모리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고 부모에게서 빌어먹음. 우연히 피자배달하러 온 아오이 유우가 그의 집을 보고 "완벽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나도 그래" 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우연히 사랑하게된 피자배달 소녀. 소녀를 찾아 10년만에 외출을 감행하는 남자. 소녀가 쓰러질 때 처럼 도쿄에 지진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도망쳐 나온다. 하지만 집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지진이 나고 집이 무너져도 그들은 나올 수 없다. 지진이 그치고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갈 때 그들은 나온다. 누가 누구를 밖으로 나오게 할 것인가. 충만한 사람들은 남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다. 나의 케잌 한조각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부족한 조각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 조각을 맞추어 나간다. 사랑의 키워드를 파워 온! 한 남자. 그들은 흔들린다. 도쿄가 흔들린다. 사실은 두 사람이 흔들린다.
30분짜리든 120분 짜리든 240분짜리든 영화의 한편은 같다. 세 편의 영화를 생각해야 하기에 머리도 더욱 복잡하다. 장편소설을 읽으나 단편소설을 읽으나 독후감은 200자 원고지 10장 이상 제출이다. 감정을 정리 하는 것이 세배다. 역시 봉준호는 옴니버스의 사이에 끼어 비교당하는것이 무척 두렵다고 했다. 플란더스의 개가 달랐고 살인의 추억이 달랐고 괴물이 달랐다. 흔들리는 도쿄가 다르다. 마더는 어떻게 다를까. 그리고 어떤 것이 같을까. 미셸 공드리는 일본인 배우를 썼지만 그의 냄새가 난다. 그는 인간을 파고든다. 레오 까락스는 일본속에 이방인을 넣었다. 도쿄라는 단어에 부담이 없다. 이질감이 있고 이방인이라면 그만큼의 주제를 쓴다. 봉준호는 일본의 냄새가 난다. 하지만 모두를 아우른다. 봉도 봉의 색깔을 넣고 싶었을 것이다. 앞의 두 감독에서 느꼈던 "걔 답다"라는 느낌을 주고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쉽게 봉을 느끼기도 어렵다. 블록버스터와 치밀한 시나리오의 봉만 생각한다. 이런 봉은 처음이다. 하지만 그의 메세지는 있지 않은가. 소시민, 소외, 그리고 사랑. 미셸공드리의 공생, 레오 까락스의 본심, 그리고 모든것을 담고 있는 나약한 사랑 봉이 있다.
아, 젠장 잊을 뻔 했다. 오늘의 짤방>>>>>>>>
아키라와 히로코 片::상사를 욕하는 아저씨
"작년에 폐렴에 걸렸는데, 아쉽게도 의사를 잘 만났지 뭐야"
흔들리는 도쿄 片::-피자배달 소녀의 근황을 묻는 남자에게 "그여자는 내 마누라다"
....
"뻥이다."
[출처] 디테일한 세개의 시선 :: 도쿄!|작성자 고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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