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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드래기
2010. 7. 10. 15:33 노는사람/화폭

 

  *** 본 포스팅은 2010년 7월 母블로그에 포스팅 했던 글을 정리 편집 한 것입니다. 간간히 상황이 묘한 부분이 있다면 과거의 글이라 그런것이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우연히 읽었던 '러시아 미술사' 때문에 요즘 '상트 뻬쩨르부르크'병에 걸렸습니다. 시베리에 횡단열차에 대한 로망에 빠져 경의선개통이 블라디보스톡까지되면 꼭 가보리라!!! 했던 시절이 있었는데(시국을 보니 그건 안될 말) 완전히 러시아에 대한 불이 붙었습니다. 그림을 그린다 하면서도 도대체 그림을 볼 때는 어떤것을 보아야 아름답다고하고 감동을 받는다고 하는것일까 의문에 빠졌는데 어려도 나이를 꽁으로 먹은것은 아닌지 요즘은 그쪽으로 신경이 예민해져서 매일같이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있는 화집이 있는데 '케테 콜비츠'와 몇장없는 '그레고리 소로카'의 그림입니다.

 

 2000년대 초 여느 예술대생들이 그랬던것 처럼 클림트를 위시한 오스트리아 분리파의 화려하고 강한 인상의 작품들에 빠져있다가 우연히 알게된 케테 콜비츠의 판화들이 석탄가루처럼 숨에 턱하니 막혀 온 뒤로 그림이란것이 비단 아름다움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은 눈으로 보여지는것인데 어떻게 작자의 마음이 비추어질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그 마음이 전달되는가 이해하지 못하다가 본격적으로 강하게 전달받게된 계기라고 할까요. 역시나 글도, 음악도, 그림도 인간의 진심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그저 예쁜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 러시아의 농노 화가 그리고리 소로카의 그림 한장으로 숨이 턱 막히는걸 느꼈습니다. 원화였다면 뻥을 좀 보태서 정말 기절했을지도요. 다독을 하는 아이가 논술을 잘 하는것 처럼 그림도 보고보고 보고보고 보고보고 보다보면 진심이 느껴질런가요.러시아의 풍속화가 본격화 되기 직전 비참한 농노계급이었던 소로카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풍경화에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고립과 외로움이 전해졌습니다.

 




 
 본래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인간의 허무함'이란 아주 부르주아적인 발상으로 위험분자로 찍기 마련입니다. 어쨌든 소로카의 시대는 아직 혁명 전이었으니 그의 개인적 허무함이 인민에게 영향을 미치거나 말거나 따위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나 느꼈던 '이어폰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듯 한' 정적을 이 '낚시꾼'이란 그림에서 느끼면서 사실 어떤 초현실주의 작가의 것인줄 알았습니다. 마그리트의 추구하는 바가 그러했고 성과가 그랬던 것 처럼 이사람에게도 어떠한 철학이 있지 않았을까 라는 아주 성급한 결론.

 




 
분명히 살아있는 것을 그리고 있고 움직이고 있고 바람이 불고 있지만 살아있는 것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보통 우리가 '잘그렸다'라고 풍경화를 보고 감탄할때는 꽃의 향기가 느껴지고 새소리가 들리고 촉촉한 비가 느껴집니다. 하지만 분명 이 살아움직이는 것들 속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것에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골때리는 야후 영어사이트들과 '러시아 미술사'를 읽으면서 알게된 그의 삶에대한 짧은 정보는 단박에 이 고립된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 그는 자신의 모든것을 걸고 그림을 그렸다는것을 알게 해주고 더욱 슬프게 합니다.
 




 

 그리고리 소로카[Grigory Soroka : 1823~1864]는 화가이기 이전에 농노였습니다. 세계사 시간에배운 바로 그 농노. 농사짓는 노예, 지주의 재산입니다. 서유럽에 비해 개혁이 느렸던 러시아는 아주 근대에 까지 농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장영실도 그러할진데 러시아의 그 수많은 농노들중에 어찌 재능있는 천재가 없었겠습니까. 당시 상트뻬쩨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는 귀족들 외에도 이런 재능있는 농노들이 많았는데 이 아카데미의 '농노 학생 추방사건'으로 인해 의식있는 한 사람 베네치아 노프가 농노들을 위한 미술학교를 세웁니다. 소로카는 바로 이 미술학교 출신입니다.

 

 농노출신 화가들 중에도 다행히 어느정도 능력을 인정받아 후에 신분해방이 되는 사람도 있지만 소로카는 절대 그렇지 못합니다. 아카데미의 교육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고 빛을 그리고 살아있는 모습들을 그리지만 말그대로 그의 눈에 살아있는 피사체들은 자신과는 동떨어져있습니다. 그의 인생에 살아있는 것들의 아름다움 하나하나가 신에대한 감사로이어지는 그런 사치스러운 감성은 없습니다. 마음의 문은 닫혀있고 매일가이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 그는 주인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자신의 그림을 그리면서 근근히 생의 끈을 잡아온것입니다.

 

 

 





무엇을 보고있어도 그의 그림은 철저하게 자기위주인것 같습니다. 자신의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없어 수많은 피사체들과 교감을 시도하지만 너무나 굳게 닫혀있었던것 같습니다. 강물은 흐르지않고 시간은 멈추어있고 햇살이 비치는 방안은 따뜻하지 않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느꼈던 놀랍도록 탐스러운 빛은 그의 손에는 닿지 않는 자유와 같습니다.

 


 





 

스승 베네치아노프는 소로카의 주인에게 끝까지 신분해방을 요청했지만 아주 욕심쟁이 주인은 차르의 농노해방령이 내려지기 까지 절대로 그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러시아 미술사'의 내용을 빌자면 그림도 그릴줄 아는 아주 유용한 노예를 풀어주기 아까운것도 있었겠지만 말 그대로 그는 '자유롭던 말던 내 알바가 아닌' 하나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베네치아노프의 사후 안타깝게도 소로카는 희망을 완전히 잃고 술에 취해 살았으며 그가 죽기 몇년전 농노해방령이 내려졌지만 결국 소작데기삶밖에 없었던 그는 삽화를 그리며 근근히 살아가고 그림은 완전히 포기해버립니다. 설상가상으로 농민해방운동에 연루되어 극한 형벌을 받고 끝내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극의 주인공입니다.

 
 


 
원화를 보게된다면 어떨까, 이런마음이 요즘 간곡합니다. 고작 인쇄된 몇장. 모니터에 떠다니는 JPG몇장으로 전해져오는 적막이 원화라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케테콜비츠의 작은 그림에서 격동을 느낀 것 처럼 가슴이 울렁울렁 거리는 적막을 직접 느껴보고 싶다는 마음이 한가득입니다. 지인중에 동생이 러시아에 유학가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괜히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상트 뻬쩨르부르크의 미술관으로 가본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매일같습니다.
 
 




 케테콜비츠가 개인의 아픔을 이타심으로 승화하고 사회로의 활동으로 뻗게되었다면 이 소극적이고 소심하고 병약한 한 남자는 갖힌 눈으로 세상을 보고있습니다. 아무말도 할 수 없는 개인의 감정이 이토록 강하게 전해져 온것도 처음인것 같습니다. 우리가 고흐의 그림을 보고 그의 뒤섞인 머릿속을 조금이나마 예상해볼 수 있다면 이사람은 아무것도 드러내지 못하고있습니다. 억눌리고 억눌려서 자신의 감성을 피사체속에 숨겨놓고 있습니다.
 
 



 

 서유럽의 급격한 발달로 그동안 쉽게 화려한 인상주의 그림들에 익숙해져있었던것 같습니다. 화려함, 아름다움 부르주아의 삶 추상이냐 구상이냐를 놓고 급속도로 논쟁하고 격하게 발전을 거듭해온 19세기 주류들의 작품들을 그동안 '그림값'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했던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던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림을 보는거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딱히 할 말이 없었던 것도 저도 사실은 그림을 보이는 아름다움과 구도, 형식적인것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림은 어떤 예술보다도 자기자신을 숨길수 있는 최고로 위선적인 활동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림에는 작가의 마음이 드러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2009년 예술의 전당에서 클림트전을 보고도 베토벤 프리즈의 규모, 그의 스케치를 보게되어 기뻤다 라는 말 이외에는 표현 할 수 없었던것도 이런것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확실한건 클림트는 여성을 매우 좋아했다는것 만은 정확히 느끼고 왔습니다.)

 

 그림을 '보는것'에 대해서도 생각을 바꾸어야할 필요가 있는것 같습니다. 유행하는 것, 새로운 것, 참신함도 물론이지만 단순히 '아이디어'와 '사회적 메세지' 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척도가 아닌것 같습니다. 잭슨 폴락의 과격한 추상화가 아니어도, 고흐의 각막에 비추어진 빛깔이 아니더라도 표현하지 않는 소극적인 작가의 감성은 그림에도 역시 묻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아티스트도 중요하겠지만 절실하게 느끼는것이 공부입니다. 저 따위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서도 사실 학부생들 조차도 미대생이란 그림그리는 기계로 보입니다. 그럴바엔 애초에 학문으로 만날 필요도 없이 공방을 나가는게 낫습니다. 중국의 그림거리처럼 복제화를 그리면서 테크닉을 쌓으면 될 것입니다. 학부의 커리큘럼은 점점 실기위주로만 바뀌거나 이론이나 감상을 위시할 학부는 점점 폐쇄되어가는 분위기 입니다. 폼으로 미대를 다니는 사람도 사실은 무척 많이 있습니다.

 

 공부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가 한 획을 그을 인물이 되거나 대단한 학자가 되진 못하겠지만서도 미술이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은 단순히 현란한 눈요기나 분위기를 의식한 메세지만 이 아니란것을 알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건 정말 그냥 기술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림을 다시 그리고싶다 그리고싶다 하면서 안타까운것은 항상 좁은시야로 건방진 자신감으로 도전했던 그때에 비해 내가 얼마나 보잘것 없는가를 느낄 때입니다. 그리는것이 다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나를 더 성숙하게 만들 공부를 하고싶다는 욕구가 무궁무진 합니다. 사람들이 보지 못한 세계 여러곳의 정말 아름다운 그림과 소통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내가 그 교두보가 된다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꿈에 지나지 않지만 사람은 꿈을 꾸어야 사는 가치가 있다하지 않습디까?

 

 

 

 

 

 

 


posted by 다드래기